Title: The Political Situation in the King Munseong(文聖王)’s Rule and the Political Background of Creation of Changlimsa Mugujeongtapwonki(昌林寺 無垢淨塔願記)
Abstract:文聖王은 등극하자마자 王京의 모든 정치세력을 포용하여 화해ㆍ상생의 정치를 추구했지만 재위 11년(849)까지 親金明勢力, 張保皐勢力, 反金陽勢力으로부터 모두 4차례의 반란사건을 겪으면서 왕권에 심대한 위협을 받았다. 그러나 왕실 외척으로서 공신세력을 대표하였던 金陽과 上大等 金禮徵의 활약 덕분에 모든 반란을 평정할 수 있었다. 문성왕은 재위 전반부 말미에 ...文聖王은 등극하자마자 王京의 모든 정치세력을 포용하여 화해ㆍ상생의 정치를 추구했지만 재위 11년(849)까지 親金明勢力, 張保皐勢力, 反金陽勢力으로부터 모두 4차례의 반란사건을 겪으면서 왕권에 심대한 위협을 받았다. 그러나 왕실 외척으로서 공신세력을 대표하였던 金陽과 上大等 金禮徵의 활약 덕분에 모든 반란을 평정할 수 있었다. 문성왕은 재위 전반부 말미에 憲貞系를 대표하는 金啓明을 侍中으로, 均貞系를 대표하는 金義正(金誼靖)을 上大等에 임명하여 武烈王系 김양과 더불어 상호견제를 통한 권력의 분립을 이룩함으로써 왕권을 크게 신장시켰다. 문성왕대 김양은 兵部令을 역임하며 北相(北宰相)으로 인식되었고, 훗날 憲安王으로 등극하는 문성왕의 숙부 김의정은 시중 金義琮(金義宗)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며 禮部令을 맡아 南相(南宰相)으로 인식되었다. 이 두 인물은 문성왕대 전체를 통하여 국왕을 지지ㆍ호위하던 양대 축이었으며, 시중 김계명은 문성왕대 후반부에 국왕의 신임을 배경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늘려나갔다.BR 문성왕은 張保皐가 암살된 841년 11월 이래 오랜 세월에 걸쳐 청해진세력을 최종 진압하였던 재위 8년(846)에 이르러 「法光寺石塔記」를 새겨 祖父 金均貞의 淨土往生을 기원하는 한편 均貞系의 왕위계승을 정당화하였다. 한편 청해진 잔존 세력을 碧骨郡으로 이주시켰던 재위 13년(851)에는 唐나라로부터 佛經과 佛牙를 들여와 불교를 진흥시키는 한편 민심을 위무하고 왕실의 위엄을 드높이려 하였다. 이후 재위 17년(855)에 이르러 昌林寺에 「無垢淨塔願記」를 조성하여 왕권의 신성함과 우월함을 대내외에 천명하였다. 아울러 4차례의 반역사건에 연루되어 희생된 자들과 대재해ㆍ기근을 당해 사망한 백성들의 死後淨土往生을 기원하였다. 「창림사 무구정탑원기」의 조성은 분열되고 반목하였던 정치세력의 화해와 對民慰撫라는 국왕의 숨겨진 의도를 정토신앙이라는 불교사상으로 승화시킨 것이었다.BR 창림사에 무구정탑을 조성하는 총책임을 맡았던 문성왕의 從弟 金銳는 균정계 였고, 김예를 보좌했던 從叔 金繼宗ㆍ金勳榮은 憲貞系였다. 이들은 地方勢力을 통제하려는 문성왕의 정치적 의도에 따라 熊州ㆍ武州ㆍ康州 등 지방의 주요 거점에 파견된 지방관이었다. 김예ㆍ김계종ㆍ김훈영의 존재를 통해서, 문성왕대 후반부 국왕이 균정계ㆍ헌정계 親族을 중심으로 하여 정국을 운영해나가고 있었음을 통찰할 수 있다.Read More
Publication Year: 2011
Publication Date: 2011-04-30
Language: ko
Type: article
Indexed In: ['crossref']
Access and Citation
Cited By Count: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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